젊은이들이여!
당신이 이곳에 왜 왔는가?
당신을 누가 이곳에 보내주었는가?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신의 인생은 결코 하찮은 인생이 아닙니다.
그리 많은 시간이 당신 앞에 있지 않습니다.
당신을 위해 자나깨나 걱정하고 계시는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아니 나 자신, 나의 미래를 위해서 방황하지 말고 당신이 이곳 필리핀의 작은 도시 바기오까지 온 목적이 무엇인지 항상 생각하며 목표를 위해 정진하기를 바랍니다.
아래에 인용하는 글은 제43대 육사 교장 시절(2004년)에 육사 생도들을 훈육하고자 쓴 “ 김 충배 중장”의 글로써 요즘의 젊은이들이 꼭 읽어 보았으면 해서 올립니다.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나 그리고 조상의 삶이었습니다. 오늘날 당신들을 있게 해준 고마운 분들이십니다.
우리의 아픈 추억일는지는 모르겠으나···.
역사라는 것은 새로이 쓸 수도 없는 것이며, 그대로 간직해야만 되는 우리의 과거입니다.
그러기에 잊어서도 안 되고 깊이 되새기면서 우리의 미래를 밝게 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읽으면서 함께 울어보시고, 마음의 각오를 다시 하시기를···.

지금 5-60 대는
육사 교장 김 충 배 중장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 들이여! 여러분은 5,6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지금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로움 뒤에는 지난날 5,60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5.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한다면 아시아, 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때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 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 6천명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 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 바다가 되어 있었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 캐는 광부 일을 했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여자 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해서 붙여진 별명이’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리었다.
몇 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 대통령이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사와 전세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쿠데타군에게 비행기를 빌려 줄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을 거리에서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 코리안 광부 만세! 코리안 엔젤 만세!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박 대통령은 창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땡큐! 땡큐! 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그들은 5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강당에 모여들었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연설했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땅속 1,000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가며 힘든 일을 하는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일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합시다. 열심히 합시다.”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박 대통령은 계속 일하자는 이 말을 반복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역만리 타국 땅 수 천 미터 지하에 내려가 힘들게 고생하는 남자 광부들과 굳어버린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며 힘든 병원 일을 하는 어린 여자 간호사들. 그리고 고국에서 배곯는 가난한 내 나라 국민이 생각나서 더는 참지 못해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란 귀한 신분도 잊은 채 소리내어 눈물 흘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 모두 울면서 영부인 육 영수 여사 앞으로 몰려나갔다.
어머니! 어머니! 하며···.
육 여사의 옷을 잡고 울었고, 그분의 옷이 찢어질 정도로 잡고 늘어졌다. 육 여사도 함께 울면서 내 자식같이 한 명 한 명 껴안아 주며, “조금만 참으세요.”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절하며 울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주세요. 우리 대통령을 도와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를 수없이 반복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오자 미쳐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광부들이 떠나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붙잡고 “우릴 두고 어디 가세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부모님이 보고 싶어요.” 하며 떠나는 박 대통령과 육 여사를 놓아 줄 줄을 몰랐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 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직접 주며 “우리가 도와주겠습니다. 서독 국민이 도와주겠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독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히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를 반복해서 말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 등···. 이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었다.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부터 무려 4,6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후 그대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 보수 수구세력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파세요!”하며 길게 땋아 늘인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 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 머리카락을 잘랐고, 먹고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래서 한국의 가발산업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곰 인형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였다. 쥐 털로 일명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1965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세계가 놀랐다.
“저 거지들이 1억 달러를 수출해?” 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조국근대화’의 점화는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이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후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됐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우리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이 수구 보수 세력으로 폄훼 하는 그때 그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명심할 것은 그때 이방인의 시신을 닦던 간호사와 수천 미터 지하 탄광에서 땀 흘리며 일한 우리의 광부, 목숨을 담보로 이국전선에서 피를 흘리는 우리 국군장병, 작열하는 사막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한 5,60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반전과 평화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훼할 자격이 있는가?
그대들이 그때 땀 흘리며 일한 오늘의 5,60대들을 보수 수구세력으로 폄훼하기에 앞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가경영을 세계와 미래라는 큰 틀 전체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보다 나은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즐겨 참고 견뎌 국민소득 4만 불대의 고지 달성 때까지는 우리 신, 구세대는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갈라져 반목하고 갈등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이제 우리 모두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같은 뿌리에 난 상생의 관계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 번 뭉쳐보자. 우리 모두 선배를, 원로를,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며, 우리 모두 후배들을 격려하고, 베풀고, 이해 해주면서 함께 가보자.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에 더욱 밝은 빛이 비쳐 지리니!

관련된 신문 논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단상에 올라섰다.
그 순간 함보른탄광 광부들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차츰 커지던 애국가 소리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목부터 목멘 소리로 변해갔고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에 이르러서는 울음소리가 가사를 대신해 버렸다. 대통령 부부, 300여 명의 우리 광부와 50여 명의 우리 간호사 모두가 고개를 박고 어깨를 들먹였다. 밴드의 애국가 연주가 끝나자 박정희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코를 풀더니 연단으로 걸어나갔다.
“여러분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대통령의 준비된 연설은 여기서 몇 구절 더 나가지 못했다. 이 구석 저 구석의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해갔기 때문이다.
그러자 박정희는 연설원고를 옆으로 밀쳐버렸다.
“광원 여러분, 간호사 여러분, 가족이나 고향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알지만…,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하여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결국 대통령은 연설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본인도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광부들에게 파고다 담배 500갑을 선물로 나눠주고, 돌아갈 차에 올랐다. 차 속에서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애쓰는 박정희를 보고, 곁에 앉은 뤼브케 서독 대통령이 자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박정희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1964년 12월 10일 서독 루르탄광지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불과 40년 전의 이 ‘사건’을 지금 이 나라에서 아직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나라를 쥐고 흔드는 단병호 민노총 위원장이 그때 열네 살, 이남순 한국노총위원장은 열한 살, 노무현 대통령을 만든 일등공신이라는 배우 문성근과 명계남이 각각 열 살, 열한 살 무렵이다. 그러니 386들이야 이 ‘눈물 젖은 역사’를 알 턱이 없다. 역사를 모르니, 그 역사를 숨 쉬던 사람의 모습이 보일 리도 없다. 애국가를 부르며 흐느끼던 광부들도 사실은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선발된 사람들이다. 63년 파독 광부 500명 모집에 4만 6,000명이 몰려들었다. 상당수가 대학졸업자와 중퇴자들이었다. 당시 남한 인구 2,400만 명에 정부공식 통계에 나타난 실업자 숫자만도 250만 명이 넘었다. 이런 시절이니 매월 600마르크(160달러)의 직장에 지원자가 밀려드는 게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루르탄광 지하 1,000m와 3,000m 사이 막장에서 1m 파 들어갈 때마다 4~5마르크를 받았다.
66년 12월, 3년의 고용기간을 채우고 142명의 파독광부 제1진이 귀국했을 때 거의 전원이 1회 이상의 골절상 병력을 안고 있었다. 사망자도 있었고, 실명한 사람도 있었다.
간호사의 사정도 비슷했다. 66년 1월 128명이 독일로 떠날 때의 고용조건은 월 보수 440마르크(110달러)였다.
독일 땅에 도착한 한국 간호사들이 처음 맡았던 일은 알콜 묻힌 거즈로 사망한 사람의 몸을 닦는 작업이었다. 70년대 중반에는 서베를린에만 한국 간호사가 2,000명이 넘었다. 66~76년 독일로 건너간 한국 간호사가 1만 30명, 광부들은 63~78년까지 7,800여 명이 건너갔다. 이들의 송금액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GNP의 2%대에 달했다.
단병호, 이남순, 문성근, 명계남씨는 이 ‘숨 가쁜 역사’와 ‘눈물 젖은 빵’을 모를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라를 벼랑으로 떠밀고 공영방송을 통한 현대사 비틀기를 계속한다면, 옛 시절 용어로 ‘비국민’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요즘 일요일이면 수백 명의 필리핀 근로자들이 혜화동 성당 부근에 모여든다.   
  이국생활의 고단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일 것이다.
우리 광부가 서독으로 떠날 무렵 필리핀의 1인당 GNP는 257달러, 한국은 79달러였다.
60년대 한국은 지금 안산공단 부근에서 곧잘 마주치는 근로자들의 모국 파키스탄으로 제철소 건설과 운영의 노하우를 물으러 시찰단을 보냈던 나라다. 올라가는 역사만 기억하고 내려갔던 역사는 잊고 사는 국가가 있다. 그런 국가는 잊고 싶은 역사의 바로 그 대목을 되풀이하게 돼 있다.  그것이 제멋대로의 선택적 망각에 대해 역사가 내리는 벌이다.
애국가 마지막 구절을 통곡으로 대신 할 수밖에 없었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설움을 까맣게 잊고 사는 오늘의 한국이 두렵고 걱정스러운 것도 이 때문이다.
(강 천석· 조선일보 논설주간)

 이상의 글은 발행인이 유물론자이거나 개발독재근대화론을 찬양하여 전 박 정희대통령을 미화하기위해 쓴 것이아니며,  교민 김 성욱님이 보내주신 글을 우리 바기오의 한인 젊은이들에게 미쳐알지 못했던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격은 피눈물나는 근대화를 위한 노력을 알려 인생을 삶에 자극재가 되지않을까하여 재구성하여 조심스럽게 올립니다.